전시개요
- 기간 : 2013.5.1-7
- 장소 : 인사아트센터 4층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전화 : 02 736-1020
고원재 개인전 <천년의 내밀한 기억>에 부쳐
한없이 낮게 흐르는 바위의 숨결
자연물 가운데 돌만큼 시간의 흔적이 더디게 기록되는 대상은 없다. 시간은 돌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서, 돌의 시간은 일상적인 시간감각으로는 측정될 수 없다. ‘1억 5천만 년전 쥐라기 시대에 바다 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바위들의 현재에 사진작가 고원재는 앵글을 맞췄다. 대략 15만 년전에 호모 사피언스가 출현했다고 할 때, 이 바위들의 원초적인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고원재는 태고적 지각변동이 만들어낸 태백 준령의 강릉 주변에 위치한 이 바위들의 숨결을 느끼며 나고 자랐다. 익히 보아왔지만 아직 보지 못했던 바위들의 시간과 이야기에 그는 이제야 눈을 뜬다. 아들바위, 갓바위 등 숱한 사연이 깃든 돌들의 형상에서 사진적 이미지를 채취하여 바위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낸다. 이미지들은 만물상(萬物相) 혹은 만신전(萬神殿)을 방불케 한다. 바위의 다양한 형상은 자연에게는 장시간 자신을 드러낸 결과이지만, 현대의 인간에게 그것은 신화세계에서 현대문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돌의 세계에는 가식이 없다. 그래서 바위는 정직하고 성실하다. 금석맹약(金石盟約)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지난 번 전시 <소나무는 휴머니즘이다>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것이라면, 이번 <천년의 내밀한 기억> 전은 작가의 생의지(生意志)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런 한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읊조리듯이 “온갖 바람이 ‘어디인가? 어디에서인가? 어디로인가?’ 물어가며 불어닥치는 / 날씨가 갈리는 경계인 영원한 땅 / 단단한 원시의 바위 / 이 더없이 높고 단단한 원시 산줄기 위에 /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가 이 장면에서 어울린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긴 세월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서히 자신을 일궈온 바위의 의지에 작가 고원재는 동감한다.
작가가 포착한 이미지는 대부분 인물과 생물의 초상이다. 바위에 새겨진 형상에서 그는 주로 인간과 동물의 삶의 애환을 본다.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외눈박이 <키클롭스>, 기나긴 항해를 통해 생사의 숱한 기로에서 귀향한 <오디세우스의 상처 입은 영광>, 가족애를 담은 <고릴라 가족의 행복한 한 때>, <아기고래, 아기코끼리와 놀다>, 애틋한 갈망이 표현된 <오롯한 기다림>, <개구리 왕자의 소망>, <기다림의 물질적 진실>, 사랑의 감정이 가득 담긴 <고귀한 사랑의 결실>, , 장난기 어린 이미지를 담은 <슈퍼맨의 주먹>, <아기공룡 둘리 엄마> 그리고 개별적인 이미지로서 <타이타닉호의 최후>, <손기정 투구>, <해골산>, <할미의 추억>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밖에 추상적인 이미지로 <반가사유상>, <침묵의 힘>, <언젠가는 돌로 누워 하늘을 우러르리> 등의 작품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지점을 암시한다.
돌은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대표자 격이다.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시간으로는 가늠키 어려운 시간대 안에서 바위는 보이지 않는 생성과 해체의 운동을 수없이 반복하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빚어냈다. 영겁의 세월에 거친 변화와 운동이 이제 고원재의 사진 안에 갇혀 멈춘다. 돌은 이제야 호흡을 멈추고 휴식한다. 한없이 낮은 돌의 숨결을 찾아내어 돌에게 새로운 생명의 호흡을 부여한다. 작가 고원재의 시선을 통해 바윗돌은 이제 보이기만 하는 것을 그치고 그 안에 새겨진 자연의 노고를 듣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이제, 바다에 가면 우선 눈을 감자. 바위의 형상을 만든 물과 바람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유헌식(텍스트해석가, 단국대 교수)
천년 바위의 의지로！
강원도 바닷가에서 나는 나고 자랐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세월이 익듯 바다와 바위가 부딪쳐 전하는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유년시절을 보내고, 그 후 인생을 헤쳐가는 방법을 바다에서 배웠다.
사춘기 시절 질풍노도의 속앓이를 겪을 때나 세계의 바다를 향해 항해사의 꿈을 구체화하고 있을 청년시절에도 바다는 잔잔히 고요한 미소를 띠고 엄마처럼 포근히 나를 감싸주었다. 초로(初老)에 접어들어 인생을 뒤돌아보기 위한 쉼표가 필요할 때 찾곤 하던 바다는 공허한 마음을 치유하고 세상에 대처할 용기를 주었다. 침묵하는 바위가 있는 바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자아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이며 현실세계를 주시하는 창이기도 했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과정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영겁의 세월 속에 거대한 바위는 돌덩이가 되고 돌멩이가 되며 자갈이 되고 모래알이 되듯 우리 인생도 풍화작용을 거듭하며 변화한다, 늙어간다. 이번 전시에서 오브제로 택한 바위도 늘상 같은 위치，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세월 속에서 조금씩 변화해 왔을 것이며 앞으로 수천 아니 수억 년이 걸릴지도 모를 변화 속에서도 현재진행형을 유지할 것이다. 바위는 무수한 세월동안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넉넉한 가슴으로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거센 폭풍우에도 온몸으로 맞서 꿋꿋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파도에 검게 멍든 바위는 세상의 온갖 시련을 견뎌 온 자아의 표출이며 고난과 영광으로 점철된 내 인생의 반영이기도 하다．세월이라는 도구(tool)로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형상화된 바위의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암시하고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삶의 은유(metaphor)이다.
３년 전 이맘 때 동양의 전통적인 삶 속에 녹아있는 소나무의 선을 차분하면서도 담백한 흑백의 선율로 담아 <소나무는 휴머니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