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있어 그림자만 놓여진 ‘정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에게 이전의 행보에 관해 이것 저것 물었을 때 ‘왜 그것이 궁금한가요?’ 라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작가는 ‘무엇을 한’ ‘과거의 자아’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 ‘지금의 자아’의 모습으로 평가 받고 싶어했다. 그녀의 작품에서도 그런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정물을 그리지만 정물이 중심이 아닌, 정물이 가지는 다각도의 그림자가 화면을 채우고 있다. 다가도의 비춰진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작가는 더 이상의 설명이나 작가의 의도를 언급하기를 거부한다. 작가는 작품의 해석과 이해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라고 말한다.
‘정물-그림자가 놓여진’이라는 전시 제목이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정물화는 과일, 꽃, 화병처럼 움직이지 않는 물체들을 놓고 그린 그림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따뜻한 햇살이 드는 책상에 사과와 포도가 놓인 그림을 떠올릴 것이다. 물체를 그릴 때 빛과 그림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빛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물체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며 이는 그림의 느낌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 정물화를 한 번이라도 그려본 사람들이라면 정물화에 빛과 그림자가 표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전시 제목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일까?
이다연 작가는 전시와 관련된 어떠한 글에서도 본인이 작품에 담고자하는 의미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작품 의도가 관람객들의 생각에 개입되어 일종의 주입식 정보가 될 수 있음을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이 부분이 작가가 담고자 하는 의미 그 자체였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 ‘정물’이라는 전시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대상이 되는 정물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단색의 그림자만이 겹겹이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 그림자를 통해서 그 자리에 어떤 사물이 있었는지 추측한다. 원형의 기다란 몸체가 있고 그 옆에 알파벳 D의 형상과 같은 곡선이 있는 그림자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그림자를 통해 그 자리에 컵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컵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추측하는 그 컵이 과연 진짜의 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확신할 수 없는 진짜 사물의 모습, 즉 사물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그림자를 보고 사물의 모습을 짐작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그림자를 보고 그에 대한 개념을 정의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주입되어 머릿속에 하나의 개념이 정의된다. 주입된 정보들이 쌓여 개개인마다 각자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직면할 때마다 그 개념을 바탕으로 또 다른 개념을 만들어낸다. 넘쳐흐르는 세상 속의 정보들을 수용하면서 가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정보들로부터 수용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가진 생각은 진짜 나의 생각일까? 나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도 타인이 나에게 수용시키는 수 많은 정보들로 이루어져있지 않은가? 내 생각의 본질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과연 자신에게서 비롯된 생각인지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 생각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내부에 존재하는 본질이 외부의 정보들로 쉽게 판단 내리는 것을 경계하며 본질을 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본질은 찾는 자체가 어려우며 끝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작가는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을 그리지 않고 그림자의 형태를 사용하여 본질을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외부정보들을 나타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