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엘갤러리 기획 표인숙 개인전 '표피적 가로수'
2014.10.17(금)~11.04(화)
표인숙, RANDOM 14-01, Stainless steel, 2800x75x75mm, 2014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 대중도 더 빠른 것을 원하고 상품도 각기 더 빠름을 앞세워 무한경쟁을 펼친다. 음식마저 빠른 패스트푸드(Fast food)다. 스피드가 생명인 사회에서 예술은 예외일 수 있을까. 예술 역시 정보매체의 발달에 의한 파급력, 복제로 인한 예술품의 제작 속도까지 빠르게 진행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표인숙 작가는 이에 역행하려 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주재료인 스테인레스 스틸은 강철의 한 종류로 단단하고 반짝이는 균일한 표면을 가진다. 무엇보다 부식이 일어나기 어려운 성질인 내식성이 강해 웬만해서 녹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그러나 작가는 물질적 속성을 완벽히 반(反)하여 그만의 모순된 기법을 고집한다. 스테인레스 스틸에 열을 가하고 산화시켜 부식시킨다. 이 과정에 최소 5년이 걸린다. 한 작품을 위해 5년, 10년을 투자하면 그제야 스테인레스에는 갈라짐, 즉 크랙(Crack)이 생긴다. 하나의 스테인레스 스틸 덩어리에는 산화정도에 따라 다른 크기의 입자 크랙이 생겨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작품의 색깔도 물감을 입힌 것이 아니다. 산화되면서 재료에서 자연스레 품어내는 것이다.
표인숙, RANDOM 14-4, Stainless steel, 90x70x280mm, 2014
스테인레스 스틸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금속인 철의 단점을 보완한 것으로, 반짝이는 표면과 편리함으로 도시의 이곳저곳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스테인레스 스틸의 차갑고 인공적인 느낌은 도시와 닮았다. 이 도시적인 재료로 완성된 표인숙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게도 나뭇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인력이 아닌 시간의 힘을 빌림으로 반짝이는 저마다의 '나뭇결'이 되었다. 수년간 부식되어, 거울처럼 반사되는 성질을 잃은 표면은 모양뿐만 아니라 따뜻한 느낌 까지도 자연의 나무와 흡사하다. 숲 속 우거진 나무보다는 도시의 가로수와 같이 잘 다듬어진 나무와 닮았다. 작가와 재료는 살이 깎이는 고통과 긴 시간의 인내를 함께 견디며 가장 도시적인 재료로 자연을 쏙 빼닮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표인숙, RANDOM 14-03, Stainless steel, 120x75x570mm, 2014
작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다.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길어야 했고, 이는 온 가족을 힘들게 했다. 갈라진 논바닥의 균열은 어린 시절의 삶의 고통이었다. 이 고통은 그의 작품에 형상으로 드러난다. 작품의 표면은 산산이 갈라질지라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갈라진 논바닥을 보며 처음 겪은 삶의 위기, 딛고 일어나고 또 다시 위기를 맞기를 반복하며 성장해온 실재하는 작가의 인생과 같다. 긴 세월 거듭되는 인고의 시간과 과정을 거친 작품은 작가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지 않을까.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모습, 강인한 것이었으나 그 과정 속에서 균열이 가고 갈라져 부서지고 말 것 같은 연약한 모습, 그러나 더 이상 부서지지 않고 견뎌내는 내면의 단단함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어떤 이의 삶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내 삶이 어떤 이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고통과 풍파에 산산이 갈라짐에도 결코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표인숙 작가의 작업은 역설을 통해 자연의 힘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과 강인한 생명력에 대해 인식하게 한다.
티엘갤러리 큐레이터_강 민 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