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다른 사람들은 아마 또렷한 자기만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라이프스타일 만큼이나 작품 활동의 영역도 다르다. 무언가에 꽂히면 그걸 포커스로 작업을 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아이디어가 없어지기 전에 그것이 주제이건 기법이건 특정 아티스트건 간에, 메모들을 랜덤하게 모아둔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느 날 하나 하나 재점검을 거친 뒤에 쓸만한걸 하나 뽑아서, 나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구상을 한 뒤에, 그림을 시작한다.
▲ 정재상, Lollipop Crusader, 60.96x91.44cm, Oil on Panel, 2011
▲ 정재상, Love as Tantalos’s, 101.6x60.96cm, Oil on Panel, 2009
예를 들자면 어떤 꿈을 꾸었는데 너무 생생하고 이쁜 이미지여서 잠이 확 깨면서, 몽유병환자처럼 일어나서, 이 꿈이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스케치북에 세세하게 스케치와 컬러와 말들을 써놓고 잔 뒤, 다음날에 그걸 그린다던지, 어떤 친한 친구를 볼 때마다 쟌다르크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 '남자'를 모델로 쟌다르크 같은 느낌으로 'lolipop crusador'를 그린다던가 하는 것이다. 별다른 큰 의미가 들어간다거나 혹은 나만의 강한 색깔을 들어가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치만 좋아하는 컬러는 있다. 예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컬러는 검붉은색이었다. 사물이 어떤 것이든 간에 고기 같은 검붉은색으로 그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는 때늦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터키 색을 좋아한다. 지갑부터 시작해서, 입고 있는 옷이며, 온갖 그림이나 조각이나 작품에 꼭 들어가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색이 그냥 좋아서, 아무런 의미 없이 모든 것에 집어넣어버린다. 그것이 소위 '배우신 작가님들’에게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치만 그래도 적어도! 나는! 나름대로 솔직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바른 뒤에 적당한 이름을 붙일 생각은 없다. 내 그림을 볼 때 내가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그린다. 남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남들이지, 내 생각이 아니다.
어려운 사상도 들어있지 않고, 어려운 말로 포장할 만큼 똑똑한 나도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내가 얼마나 묻어 있을지 모르는 솔직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랜덤한 아이디어, 랜덤한 미디엄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따금 내 그림은 쭈욱 걸어두면, 같은 작가의 작품 같지 않다는 말도 듣는다. 근데 어차피 이렇게 변덕스러운 나를 어떡하라는 건가.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점심때와 저녁때가 다른 성격인데, 그리는 사람이 다른데 그림이 같을 수가 있나.
나는 항상 일관성 있는 '어른'이지 않다. 나는 평소 나 자신에 대해서 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고쳐 나아가고 있고, 지금은 내 자신을 무작정 숨기려고 하진 않는다. (비쥬얼로 보면 사실...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만큼 하고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면 나는 이전의 그림 그리던 주제가 지금쯤 많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담아둔 게 그만큼 적어졌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빈자리는 새로운걸 넣어두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 이번엔 이게 되겠다', '이게 재미있겠다' 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서, 한참 지나고 예전 그림을 보면,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이었지 하고 절규하게 될 때도 있다. 초반에는 그림 스타일이 정말 어두웠고, 기분 나쁜 그림들을 많이 그렸던 것 같은데, 점차 내 마음이 편해지면서 조금씩 자유롭게 변해갔던 것 같고, 테크닉에 얽매어 있다가도, 어느 시점에서, '아,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싶어서 새로운 방법도 만들어보기도 한다. 그림을 전혀 못 그릴 때에 스케치해두었던 발 그림들을, 뒤집어도 보고 트레이스도 해보고 그러다보면 어떤 이미지가 나오기도 하고, 추상화를 아주 아주 작게 만들었을 때 보이는 혹은 상상되어 나타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가 부분적으로 삽입하기도하고, 그냥 마구잡이로 이런 저런 것들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강한 색깔이 나오겠지 하고서 무작정 그려본다,
▲ 정재상, Self portrait with moose, 50.8x116.84cm, Oil on Framed Panel, 2007
▲ 정재상, 고도리자, 40.64x50.8cm, Acrylic & Colored Pencils on Canvas, 2009
▲ 정재상, 삐에로, 40.64x50.8cm, Acrylic on Canvas, 2009
남들처럼 그렇게 확고한 작품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애초에 '이번엔 이렇게 그려야 한다' 라는 게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점이 나 스스로에게는 즐거움을 준다.
어떤 철학이나 심오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즐거움'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